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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_요약_-_김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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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_요약_-_김세한 [2017/04/29 05:01]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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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훈민정음)의 탄생 – 국문학과 황선엽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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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와 문자는 서로 전혀 다른 개념이다. 우리말과 한글은 다른 것이고, 영어와 로마자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바다’ 같은 이름은 한글이름이 아니라 우리말 이름, 고유어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우리말 사용과 한글 사용은 다른 것이다.
 +언어의 종류가 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모두 들으면서 세어 봐야’ 알 수 있다. 나누는 기준도 명확하지 않다. 네덜란드어와 독일어와의 차이가 서울말과 제주말의 차이보다 훨씬 적다. 광동어와 북경어(그리고 여러 개의 방언)도 그렇다. 어쨌든 평균적으로 지구상의 언어는 6~7천개쯤.
 +한국어가 좋냐, 나쁘냐는 객관적 과학적으로 전혀 주장할 수 없다. 서로 다른 특징이 있을 뿐이다. 언어는 우열이 없다. 굳이 등수를 매기자면 언어의 힘 = 사용자 수로 보면 되겠다. 그렇다면 한국어의 등수는 12(재외동포 포함)~15등(한반도).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와 비슷. 경제 순위와도 비슷함. 비교적 힘이 있는 언어라 할 수 있다. ​ 어쨌든 오늘의 토픽은 문자. 언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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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상의 문자는 약 49개. 문자는 과학적, 실용적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글이 가장 뛰어난 문자라는 것은 서양 언어학자들의 결론이다. 이 우수한 문자인 한자의 창제 과정은? 실록을 보자. (인터넷에 싹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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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1397~1450):​ 1418년 즉위 (만21세), 재위기간 32년. 조선시대 임금 중 장수, 장기 재위. 태어나신 날은 음력 5월 15일 – 스승의 날 지정도 이를 참고함. 세종 1년은 1419년 (즉위 – 선왕의 서거 또는 임기종료(?​) 다음해). 한글의 창제는 세종 25년 12월 30일 (1443년). 그런데 실록 12월 30일자 말미에 ‘이 달에(是月)’라는 표현으로 기록된다. 정확한 날짜를 알 수는 없으나 달만 기억했다는 것임. 상친제=임금이 직접 만들었다고 기록. 실록을 통틀어 ‘친제’라는 표현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명하여 만들 때는 명제(命制). 문자의 명칭도 훈민정음,​ 해례본(1446)도 이름은 훈민정음. 서문은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가 씀 (우리 임금이 창제하셨다!). 실록은 세종 사후에 적은 기록이지만 해례본은 생전에 기록. 임금 스스로의 기록 역시 ‘내 이를 불쌍히 여겨 만드’노’니…’ 라고 되어 있음. 세 개의 역사 기록이 모두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고 함. 집현전 학사들의 관여 기록은 세종 사후 30년이 넘는 성종 때나 등장함. (신숙주의 회고 등) 
 +정말일까?​ 관련 기록을 뒤져 보자. 1444년 (세종26년 2월 20일) 실록을 보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상소함. 한자를 버리고 오랑캐와 같이 스스로의 문자를 갖는 것은 사대모화에 어긋난다는 뜻. 이두도 있고 등등… 세종 왈 “신라의 설총이 만든 이두는 괜찮다고 하면서 내가 만든 훈민정음은 그르다 하는 건 뭐니?” 등등 싸우다 난리가 남. (상소 7인 1일 의금부 하옥, 정창손 삼강행실의 그림책(삼강행실도,​ ‘김화’의 살부사건 계기, 정음 창제 9년 전 –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가 되었을 수 있음) 반포 관련 비난 관련 선비부적격으로 파직, 김문 말바꾸기 능멸로 문초, 이후 장 100대의 형을 벌금형으로 대체. 최만리는 셀프 사직. 그러나 이듬해 최만리가 죽고 1년 후에야 부제학 신임. 그런데 그 자리가 정창손!)
 +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세종 25년(정음창제 2년 전) 정황을 확인하자 – 흥천사 사리각 경찬회(사리각 준공 축하하며 불공드리는 행사)에 쓸 물건을 논의함. (숭유억불임에도 불구하고 신앙 자체는 불교임 – 신진사대부의 건국이념을 존중할 뿐. 신하들은 불교 안 믿음.) 이 사건은 사대부와 임금 간의 대립 상황. 사헌부, 사간원, 집현전(최만리) 상소 지속, 육조, 대간, 성균관 등 상소 랠리, 영의정까지! 왕은 행사 계속. – 결국 1개월 간의 랠리 끝에 임금은 경찬회 집행을 철회. 세종에게는 상당한 트라우마가 되었을 것. 이 과정 내내 최만리의 파워는 지속.
 +이후 훈민정음 반포에 대한 최만리의 상소 (또!) – 초동진화를 잘못하면 대사를 그르칠 수 있음을 인식한 세종의 일련의 조치는 상당히 긴급하고 격렬했음. 의지의 표명. 최만리 역시 스스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함을 인식하고 사직. 이후 세종은 후임으로 정창손의 재교육(!) 후 2년 후 재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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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지는 집현적 대제학이나 예조판서 겸직이므로 예조로 출근. 왕의 최근방에 있는 집현전의 총괄은 부제학 최만리. 결국 위의 상소는 집현전 대표자 등 7명의 집현전 고위직이 작성한 것임. (신숙주 성삼문 등 하급관리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음.) 즉, 9년에 가까운 훈민정음 창제 과정은 실록에도 전혀 기록이 없을 정도로 공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 최만리도 창제 이후에 알게 됨. 이 과정에서 집현전 의견은 반대로 굳어짐. 결국 왕은 훈민정음의 보급에 있어 상소문의 주요 저자(?​)를 제외한 나머지 하급관리 7명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됨. 집현전 자체의 비밀 프로젝트라 하기에는 상근하는 최만리가 전혀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음. 즉, 정황상 훈민정음은 세종의 친제 확률이 높음.
 +다시 상소를 전후한 실록으로 가 보자. 세종은 “최만리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라고 말함. 태종 이방원의 피 흘린 재건국 명분이 되는 문치를 세우기 위해 발탁된 세종은 문학과 운학(음운학)에 대한 조예가 집현전 학자들보다 훨씬 높았다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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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문제는 훈민정음을 ‘언제’ 만들었는가임. 1446년 9월 실록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 기록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완성 기록임. 실록 9월 29일 기록 ​ 주시경 선생을 위시한 한글학회가 음력 9월 29일에 한글창제를 기리다가,​ 정인지 서문에 기초하여 음력 9월 10일, 이후 양력 환산으로 10월 9일로 결정. 그래서 훈민정음 ‘반포’ 기념식을 하는 것임. 다시 1443년 12월이 정설이 되긴 했고, 북한에서는 해당년 (세종25년)이 실제로 서기 1444년이므로 한글날을 1월 15일에 기념함. 그럼 왜 남한 학계에서는 1443년으로?​ 그냥 약속이라서 그리 함. 1895년 1월부터 양력을 기준으로 한 해를 잡기 전까지는 음력 1월 1일부터 12월 30일까지를 그냥 1년으로 세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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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이제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이것이 ‘왜 한글이 우수한가’에 대한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음운학: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음성을 조음 방법과 조음 위치에 따라 구분
 +중국 운학에서는 자음 소리를 아설순치후 / 불청불탁-전청-차청-전탁으로 구분.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음운학과 일관성을 이루는 문자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20세기 이후의 음운학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을 적용하여 글자를 만든 것이다.
 +글자 모양 또한 상형문자에 기초한 (규칙성을 찾을 수 없는) 기존의 문자와는 달리 발음기관의 조음 방법이나 기원을 따라 만들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고 혁신적이며 독창적이다. ​
 +한글 자체는 너무도 규칙적이고 간명하다. 한글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말(음성)과의 결합에서 나오는 맞춤법 때문이지 한글 자체의 성능과는 무관하다.
 +해외 민족의 한글 사용은 민족 내부에서는 쓰기 좋을 수 있으나 세계화 입장에서는 소통에 어려움을 주므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 할 수는 없다.
  
/var/www/wiki/data/pages/강의_요약_-_김세한.txt · 마지막으로 수정됨: 2017/04/29 05:01 저자 147.47.108.22